여성의 폭식과 우울, 장은 알고 있다

여성의 폭식과 우울, 장은 알고 있다

 

장은 뇌에 종속된 장기가 아니라는 연구 나와 “장은 생각하고 기억하고 느낀다” 섭식장애 환자 82.4%가 여성…성별 따른 사회적 경험과 건강 연관성 밝힐 열쇠

장과 뇌의 연결을 강조하는 장-뇌 축 이론. (출처 PRIME, https://www.prime-journal.com/the-gut-brain-axis-and-skin-ageing/)

 

성별과 소화기관

폭식증은 식욕을 참지 못해 음식을 급하게 많이 먹은 후 토하거나 과한 운동을 하는 증상이다. 음식 먹기를 거부하는 거식증과 함께 대표적인 섭식장애로 꼽힌다. 폭식증 환자는 대부분 여성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2014년부터 2018년까지 5년간 수집한 폭식증 및 거식증 환자 현황 자료를 보면 전체 섭식장애 환자 중 여성은 82.4%, 남성은 17.6%를 차지한다고 한다. 의학 전문가들은 섭식장애의 가장 큰 원인으로 마른 몸을 매력적으로 여기는 사회문화적 시선을 꼽는다. 섭식장애가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더 많이 나타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폭식증은 처음에 우울증의 일종으로 여겨졌다. 1970년대에 우울증약이 폭식증 증상을 완화해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였다. 하지만 폭식증 환자는 주기적인 기분 변화나 성욕 감소, 집중력 저하 등 우울증 환자에게서 전형적으로 발견되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폭식증이 우울증과 무관하다면 우울증약은 왜 폭식증 치료에 효과를 보이는 것일까? 이에 우울증약의 성분이 뇌가 포만감을 느끼는 기제에 관여하기 때문에 폭식증을 낫게 한다는 설명이 등장한다. 이러한 설명에는 폭식증을 우울증과 마찬가지로 뇌의 문제로 보는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2018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발표한 2012년부터 2016년까지 5년간 폭식증 환자 수 추이 그래프. 전체 폭식증 환자 중 약 90%가 여성이다. 출처: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생활 속 질병통계 100선>

 

 

 

장과 뇌는 연결되어 있다

 

 우울증의 생물학을 살펴보면 폭식증과 우울증이 뇌뿐 아니라 장의 문제이기도 함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울증은 뇌에서 기분 조절 기능을 하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이 부족한 상황과 연관된다고 알려져 있다. 세로토닌은 외부에서 섭취될 수 없어 우리 몸이 스스로 생산해야 하는데, 이때 두 가지 차원에서 장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우선 장은 세로토닌을 만드는 데 필요한 단백질과 탄수화물을 소화한다. 우리 몸은 단백질을 섭취해 아미노산의 일종이자 세로토닌의 주재료인 트립토판을 공급받는다. 초콜릿, 바나나, 우유, 고기, 생선은 모두 트립토판 고함량 식품이다. 단백질과 달리 탄수화물은 세로토닌 수치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나 그 영향력이 작지 않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탄수화물을 많이 먹으면 탄수화물 흡수를 조절하는 호르몬인 인슐린의 분비량이 늘어난다. 인슐린이 분비되면 혈액이 운반하는 포도당과 아미노산의 양이 줄어, 뇌에서 더 많은 트립토판을 받아들여 세로토닌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된다. 보통 단것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느끼는 기제는 이렇게 설명된다.

그러나 장은 단지 보조하는 역할만 하지 않는다. 뇌에서 만들어진 세로토닌은 전체의 5%에 불과하다. 나머지 95%는 장의 내분비 세포인 장내 크롬 친화성 세포에서 만들어진다. 장이 세로토닌 대부분을 생산하고 또 사용한다는 사실은 장과 뇌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연결되며 그 연결이 상당히 대등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장은 뇌와 척수가 관여하는 중추신경계가 아닌 별도의 신경계로 장운동을 조절한다. 식도부터 장에 이르는 9m의 길에는 적게는 2억개에서 많게는 5억개나 되는 신경세포가 분포해 있다. 이는 척수에 퍼져 있는 신경세포 양에 버금간다. 장은 이로써 우리의 의식과 무관하게 필요한 음식은 소화하고 위험한 것은 구토나 설사를 해 밖으로 내보낸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의 신경생리학자 마이클 거숀은 장이 가진 신경세포의 규모와 장 신경계의 독자적 능력을 강조하고자 장을 ‘제2의 뇌’라고 일컫기도 한다.

장에서 자체 생산된 세로토닌은 장 신경계의 다양한 기능을 조절하는 데 사용된다. 가령 세로토닌은 장 신경세포의 세로토닌 수용체와 결합해 장운동, 내장 감각, 호르몬 분비, 세포 생장 조절 등에 관여한다. 음식을 먹고 포만감을 느끼거나 때때로 통증 또는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장의 세로토닌이 뇌와 연결된 미주신경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장과 뇌의 연결은 최근 장-뇌 축이라고 불리는 이론으로 연구되고 있다. 2011년 쥐 실험으로 장과 뇌를 연결하는 장내 미생물의 역할이 밝혀진 이래, 장내 미생물로 장-뇌 축을 이해하려는 연구가 계속돼왔다. 2014년 영국 과학 주간지 <뉴 사이언티스트>에는 장내 미생물을 감정과 연관된 생물이라는 의미에서 ‘사이코바이오틱스’라고 명명한 글이 실렸다. 이 글의 저자는 장내 미생물이 세로토닌처럼 기분에 관여하는 신경전달물질인 가바(GABA)를 조절해 스트레스를 제거한다고 설명했다. 2015년 국제 학술지 <셀>에는 장내 미생물이 만들어낸 부산물이 세로토닌 분비량에 영향을 준다는 연구가 발표됐다. 장내 미생물이 감정과 연관된 신경전달물질 생산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우울증을 비롯해 지금까지 뇌의 문제로 여겨졌던 여러 증상이나 질환을 이해하고 치료하는 데 장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장 내부에서 활동하는 장내 크롬 친화성 세포(파란색 부분). 출처: Holly Ingraham/David Julius labs, https://www.ucsf.edu/news/2017/06/407506/rare-cells-are-window-gut-nervous-system

 

여성의 장에서 대체 무슨 일이

미국 에머리대학교의 페미니스트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윌슨은 장과 뇌의 연결과 장 신경계의 독자성으로 섭식장애를 새롭게 이해하려 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장은 생각하고 기억하고 느낀다.’ 장이 뇌에 종속된 장기가 아닌 상당히 발달된 자체 신경계를 가진 기관임을 강조한 표현이다.

윌슨은 1986년 국제 의학 학술지 <랜싯>에 실린 한 연구에 소개된 폭식증 환자를 예로 든다. 이 연구는 폭식증을 앓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을 나누어 코나 입을 통해 위에 관을 삽입하는 실험을 수행했다. 실험 결과 폭식증을 앓지 않는 사람은 10분 이상 헛구역질을 하고 눈물 나는 고통을 견디고서야 가까스로 관을 넣은 반면, 폭식증을 앓는 사람은 대개 아무런 어려움 없이 관을 삽입할 수 있었다. 폭식증 환자는 구토 반사를 일으키지 않은 것이다.

구토 반사란 이물질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는 반사작용으로, 보통 목구멍 뒤쪽을 자극할 때 일어난다. 그러나 위 실험에 참여한 폭식증 환자들은 목구멍 뒤쪽 자극으로 구토 반사를 일으키지 않았다. 대신 일부 환자들은 음료를 마시거나 구토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등 전혀 다른 자극으로 구토 반사를 유도했다. 폭식증을 앓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반복 행위로 구토 반사의 조건을 다르게 학습한 결과다.

일단 특정한 방식으로 구축된 구토 반사는 단순히 외부 환경을 바꾸거나 개인이 의지를 갖는다고 해서 쉽게 바뀌지 않는다. 폭식과 구토를 의식적으로 통제하기 힘든 정도가 되면 인지 행동 치료가 잘 듣지 않는데, 윌슨은 이러한 상태를 두고 ‘장이 생각하기 시작한다’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우울증약은 우울하고 화난 장을 달래주어, 즉 뇌가 아닌 장 신경계에 직접 작용하는 방식으로 만성 폭식증 환자의 증상을 개선해준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우울증약이 폭식증을 개선하는 생물학적 기제는 아직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물질과 감정, 먹고 마시는 것과 우울하고 행복한 것이 서로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여기에 장내 미생물의 역할까지 밝혀지면 이 연결은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윌슨은 소화, 호흡, 대장 운동, 신경 전달 등 모든 신체 기능을 아우르는 새로운 모델, 즉 장과 뇌 사이의 위계적 구분을 전제로 하지 않는 모델을 구축해 식이장애와 기분장애를 하나의 생물학으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장과 뇌의 연결에 대한 최신 연구는 물질과 감정을 통합해 이해하는 과학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여성의 장은 그러한 과학이 탐구하기에 가장 적절한 신체 기관이지만 아직 밝혀진 것이 많지 않다. 여성의 장이 더 연구되어야 하는 이유는 생물학적인 차이로 남녀의 사회적인 차이와 차별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를 통해 여성이 몸으로 경험하는 사회가 어떠한지 그리고 그 사회적 경험이 여성 건강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피고자 함이다.

우울증은 여성이 남성보다 1.5배에서 2배 가까이 많이 경험하는 질환이라 보고된다.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우울감이 커진 20~30대 여성의 자살률이 급증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여성이 왜 남성보다 더 높은 비율로 우울증에 걸리고 섭식장애를 겪는지를 장의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 장이 알고 있는 것을 과학이 안다면 우울한 여성, 먹고 토하는 여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

 

 

숙명여자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원문보기: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65101.html#csidxce7bc94d4934869ba9226ca0ccec6cd